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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청소년 운동으로....

글쓴이 : 희말라야무… 날짜 : 2016-11-13 (일) 16:20 조회 : 1042
다시 청소년운동으로, 그리고 다시 위대한 거부
    
에세이와 군산
포럼을 위한 원고를 에세이 방식으로 써 달라고 한다. 학술적 이론을 근거로 한 객관적이고 공공적인 표현을 과감하게 버리고 개인의 언어를 통한 솔직한 표현을 주문받았다. 익숙한 습관과 방식을 버리라고 하니 나에게는 참 반가운 제안이며 즐겁게 참여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그런데 포럼의 장소가 서울도 아니고 대전도 아닌 군산이다. 아니 세상에나... 이것도 참 반가운 제안이다. 모두에게 평등하고 공평한 것 같은 정보의 습득, 참여의 기회, 표현의 자유가 여전히 답답하게 막혀있는 일상에서의 작은 울림과도 같다. 우리는 늘 그렇게 살아왔다. 지역 불평등, 세대 불평등과 같은 현실 속에서 불평을 늘어놓기는 했지만 다시 평등으로 만들어질 수 있는 실천에는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 이번 포럼에 제안된 원고의 방식이나 서울이 아닌 군산에서의 만남을 의도한 것 자체가 다시 청소년운동으로라는 거대한 과제를 작은 것으로부터 출발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시간이 즐겁고 소중하게 느껴진다.
 
다시 질문해보자.
다시 청소년운동을 이야기하자고 한다.
그런데 다시라는 단어를 쓸 만큼 청소년 현장에서 지속적인 청소년운동이 있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물론 그 때 그 때 사회적 이슈에 따른 행동이나 외침들은 분명 있었지만 진정성 있는 세상의 변화와 그 속에서 살아가는 청소년의 자주적인 성장과 참여를 위한 논의와 실천이 이어지고 있는지?에 대한 아주 객관적이고 솔직한 질문을 던져봐야 한다. 그래서 나는 이번 포럼이 우리 스스로의 성찰과 지혜로 이에 대한 질문을 다시 시작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그간 청소년과 관련한 이론이나 현장 실천을 위한 연구와 포럼 등은 늘 있어왔지만 언제부터인가 그 많은 연구와 논의와 정책들은 청소년의 삶과 행복이라는 본질과는 멀어져가고 있음이 감지되었다. 우리는 그 동안 스스로에 대한 질문을 잃어가며 당장의 해결과제와 전망을 위해서 달려왔다. 이러한 과정들은 자기중심적 사고와 판단으로 서서히 변환되며 개인과 집단이 가져야 할 사회적 공공성에 대한 성찰과 사회적 소통에 대한 시도들을 가로 막았다. 이는 지금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자기중심적 사고로 인해 기본적인 자제력조차 잃어버린 대통령과 정부의 모습과도 무관하지 않을 수 있다. 지금 우리 앞에 던져진 문제와 과제들은 몇 몇 사람들의 불손한 힘과 우매함만으로 생겨난 것은 아니기에 스스로 가능한 개인과 집단의 질문이 필요한 시간이 온 것이다. 그래서 다시 청소년운동이라는 논의를 위해서는 다시 던져 보는 질문으로 시작하려 한다.
강대근 그리고 위대한 긍정
작고하신 강대근 선생이 떠오른다.
아이들이 울고 있다, 위대한 거부를 하자, 청년으로 살아가자라는 말을 달고 사셨던 강대근 선생이 떠오는 이유는 막연한 연민과 기억이 아닌 여전히 그 분의 말씀이 유효한 세상이기 때문일 것이다. 여전히 아이들은 울고 있고, 여전히 익숙한 것에 대한 의문과 거부가 절실한 세상이기 때문이다. 마르쿠제의 위대한 거부를 읽어주시면서 늘 이런 말씀을 하셨었다.
 
[ 외설이란 원래 기존체제 언어창고 속에 있는 윤리적 개념이지만, 오늘날에 와서는 기성사회 자체의 도덕성의 표현이 아니라 다른 표현에 사용됨으로써 이 용어는 확대 적용되고 있다. 외설적인 것은 음모(陰毛)를 노출한 발가벗은 여자의 사진이 아니라, 침략전쟁에서 받은 훈장으로 정장(正裝)을 한 장군의 사진이다. 외설스러운 것은 히피의 의식(儀式)이 아니라 평화를 위해서 전쟁이 필요하다는 교회 성직자의 설교이다. 외설에 대한 반응은 수치심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금기(TABOO)를 범하는데서 오는 죄의식의 심리학적 표현이다. 그러나 현 사회는 문명이 지니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도덕적 금기를 상당히 침범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풍요한 사회의 외설적 노출은 수치심이나 죄의식을 불러일으키지 않게 되었다.
(허버트 마르쿠제, 위대한 거부 중) ]
 
사람들은 길들여진 타율성과 자발적 복종에 익숙합니다. ....”
한 번 몸에 밴 습관에서 벗어나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자기완성을 향한
첫 걸음은 언제나 그러한 벗어남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
 
부정할 수 있는 나가 필요합니다.
그들을 부정해야 합니다.
그것을 부정해야 합니다.
그것이 위대한 긍정을 위한 시작입니다.
새로운 명제도 아니고 새로운 주장도 아니다. 하지만 생활의 실천조차 쉽지 않은 부정할 수 있는 나그리고 이를 통한 위대한 긍정을 어떻게 시작할 수 있을까? 아마도 그 시작은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일 수 있는 일상의 현실부터 다시 들춰볼 수 있는 것으로 시작되어야 할 것 같다. 예를 들면 청소년 정책, 청소년 시설, 청소년 단체 그리고 진로-직업, 모험-봉사, 가족-인성, 역사, 문화-예술-과학-환경 등으로 잘게 쪼개어 날아다니며 청소년 활동이라고 칭하는 것들이 가지는 본질적 한계와 문제들을 다시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문제나 한계나 변화의 본질을 인식하는 것이다. 청소년수련관의 본질적 문제는 무엇일까? 운영지원이 부족한 것, 공간이 부족한 것, 홍보가 부족한 것, 지도자가 부족한 것 등 당장 체감되고 보여지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을 넘어설 수 있어야 한다. 다시 예를 들어보자.
 
청소년 문화의 집, 청소년수련관, 청소년재단 등에서 일어나는 매일 매일의 일상을 무엇으로 채워가고 있을까? 각 종 계획안과 보고서, 각 종 정산서류와 영수증, 각 종 결재서류와 공문이 일상을 채우고 있는 시간이 많을까? 아니면 아이들과 시를 써보고, 노래를 만들어보고, 세상을 읽어보고 연결해보고, 다른 생각과 다른 욕망에 대한 공감을 해보고, 지금 같은 시국에 대해서 진한 토론을 하며 한 명 한 명의 생각과 선택이 담긴 피켓을 만들어 광화문 거리를 나가 볼 수 있는 시간이 더 많을까? 또는 프로그램을 계획하고 수련활동 인증을 받고 아이들을 지도(指導)하는 시간이 많을까? 아니면 함께 질문하고, 함께 배우고, 함께 상상하고, 함께 만들어가는 시간이 많을까? 이 질문은 청소년 문화의 집이나 청소년수련관이 지니고 있어야 할 본질 그리고 그곳에서 일하고 있는 우리들의 역할과 가치에 대한 본질을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는 의미이다. 우선 부정할 수 있는 나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을 시작으로 위대한 긍정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운동이 필요한거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운동은 지금까지 걸어왔던 길들의 오류와 함정과 태만을 다시 발견해보고 다시 걸어가야 할 길을 만들어갈 수 있는 청소년 운동이 필요하다. 청소년과 관련한 학문과 이론에서는 그동안 집중해왔던 지도(指導)의 기술과 방법을 넘어서 사유(思惟)와 상상, 연결(연기緣起論)과 통섭 그리고 이를 근거로 한 실천철학과 통찰의 방식들을 찾아가야 한다. 그럴 수 있어야 현장의 사람들, 현장의 일상들이 변화할 수 있다. 그리고 집단의 성찰과 함께 개인의 성찰과 변화가 함께 갈 수 있어야 한다. 진정한 운동의 시작은 아주 사소한 것 또는 아주 작은 나로부터 시작될 수 있어야 한다. 나로부터의 사유와 정신을 흔들어가며 나로부터의 실천적 근육을 만들어갈 수 있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나로부터의 스스로 학습과 성찰들이 매일 매일의 일상 속에서 시도되고 연결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나의 정신과 근육이 만들어져가는 과정 속에서 우리의 아이들도 함께 흔들리고 함께 움직여 질 수 있다. 이렇게 표현하니 너무 거창하고 거대하고 무겁게만 느껴지기도 하겠지만 늘 진정한 진지함 속에는 진정한 즐거움이 따라다닐 수 있고 진정한 즐거움의 시작으로 진정한 진지함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이렇게 재미나는 핑퐁게임을 즐기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바로 문화의 힘이다. 물론 개인적인 생각과 경험으로 판단하는 것이지만 25년 동안 아이들과 함께 한 시간 속에서 얻는 현재까지의 결론이기도 하다.
 
청소년문화운동이 아니라 그냥 문화적으로 살면 운동이 된다.
청소년문화운동, 지역사회청소년운동, 청소년수련시설에서의 청소년운동 등 따위의 구분으로는 이 글에서 누누이 강조했던 본질로서의 운동으로 접근하기 힘들다. 학교의 교과목이 구분되고 학문과 이론이 구분되고, 청소년 정책과 지원들이 오징어 다리를 찢어 먹듯이 구분되어서는 우리가 희망하는 운동으로 다가가기 힘들다. 그런 의미에서 문화라는 것은 청소년이론과 활동의 부분이 아닌 모든 것을 연결하는 전체가 되어야 하고 청소년문화운동은 어떠한 장르적 접근이 아닌 청소년, 활동가(나는 청소년지도자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싶다), 공간, 소통, 관계, 생각 등을 만들어가고, 재구성하고, 수평으로 전승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즉 평등한 문화, 자유로운 문화, 정의로운 문화, 즐거운 문화와 같은 명제들을 만들어가는 총체적인 삶의 과정이며 실천이 바로 문화이며 별도의 청소년문화운동이라는 고유명사를 호명하거나 떠올리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문화적인 태도와 실천이라는 것은 익숙한 것에 대한 스스로의 의심과 거부가 있어야 가능해진다.
 
보는 것을 믿는다 - 재현 / 눈으로 보이는 것을 의심해본다 - 생각의 탄생
 
인문학이나 예술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교과서에 있는 지식습득의 방식(이론가와 학자가 나열한 원리나 설명들)이 아닌 개별의 눈으로 그리고 현실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갑자기 이건 무슨 말인가? 라고 의문이 들 것 같아 재미있는 예를 들어본다. 사각형의 캠퍼스와 물감으로 시작된 그림 또는 예술의 세계를 마당과 광장으로 끌어낸 것이 현대미술이며 보이는 대로 이해되는 그림들을 매우 난해하거나 장난스러운 형식으로 표현되는 것이 현대미술이다. 그래서 거대한 미술관에 전시된 현대미술 작품 예를 들어 양변기를 떼어서 걸어 놓은 작품과 같은 것을 고정적인 눈과 생각으로 이해하기는 힘들어진다. 즉 작가의 배경과 철학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하고 이러한 이해와 만남들이 일상적으로 반복되어야 현대미술을 즐겁게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의 도구는 눈으로가 아닌 나의 오감이 작동될 수 있어야 한다. 결론은 보이는 것들, 안다고 생각했던 것들, 옳다고 생각했던 것들, 전혀 관심이 없어나 모르는 것들에 대한 의심과 관심과 상상들이 다시 청소년 운동으로와 무관하지 않다는 뜻이다.
 
문화는 수단, 기술, 방식이 아니다.
문화는 생각이고 상상이고 행동이고 소통이며 관계이고 변화이다. ‘다시 청소년운동으로를 실천하려면 나의 일상이 문화적으로 변환될 수 있어야 한다.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듣고,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문화적 행동 또는 실천이라고 착각하지 않아야 한다.
 
하지 않았던 생각과 시도를 해보자.
어디나 비슷하고 획일적인 다목적강당이나 동아리방의 플라스틱 명패를 떼어버리고 라면박스 종이로 발칙한 이름을 새겨놓고, 수련관 로비에 흙을 깔아 맨발로 산책을 해보자. 종일 씨름했던 행정서류와 영수증 뒷면에 온전하게 표현된 나의 일기를 쓰거나 잠시 옆에 있는 16살 친구와 함께 하늘을 보며 느껴지는 생각의 향기를 그려보자.
 
나는 행복한가? 라고 질문해보자.
행복하지 않다면 그 이유를 아주 세심하게 오감으로 질문하고 찾아보자. 내가 일하고 있는 곳이 먹고사는 것만을 위한 생존의 공간인가? 아니면 나의 존재가 들어나고 아이들의 존재가 들어나는 실존의 공간인가?를 질문해보자.
 
만나지 않았던 것들 만나보자.
청소년이 아닌 세대, 청소년과 연관되지 않을 것 같은 지식과 이론, 해왔던 일과 상관없었던 영역과 사람, 무시했거나 다르다고 여겼던 것들을 만나보고 만져보자.
 
나를 다시 바라보자.
정책, 시스템, 환경과 조건, 조직을 보기 전에 나를 먼저 바라보자. 아이들에게 질문하기 전에 나에게 먼저 질문해보자. 나와 나 사이의 소통이 가능한 조건을 먼저 만들어보자.
 
그렇게 다시 청소년 운동으로....
나와 옆 친구의 어깨를 두드려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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