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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을 말하다. 열] 품에 반한 세 가지 이유와 세 가지 기대 _ 이주빈(오마이뉴스 기자)

글쓴이 : PUM 날짜 : 2014-01-24 (금) 21:09 조회 : 2047
품에 반한 세 가지 이유와 세 가지 기대
 
 
 
# ‘건물보다는 사람’...
직업이 기자다보니 현장을 많이 접한다. 현장을 준비하는 사람을 만나기도 하고, 현장을 직접 찾아가기도 하고, 현장을 다녀온 사람의 이야기를 듣기도 한다. 뉴스는 이처럼 전혀 새로울 것 없는 지난 현장에서 나오기도 하고, 아직은 A4용지에 계획으로만 그려진 현장에서 움트기도 하고, 날선 말과 몸짓들이 충돌하는 현장 속 현장에서 전해지기도 한다. 그래도 뉴스인 까닭은 그 소식을 접하는 이가 있기 때문이다. 즉 뉴스 생산자의 입장에서 보면 그 모든 것이 다 지나간 일일 뿐이지만 뉴스 소비자 입장에서 보면 그 어느 것 하나 새롭지 않은 소식이 없다. 뉴스(news), 새로운 소식이란 그런 것이다.
 
 
품과 나와의 첫 대면 또한 현장과 기자의 만남이었다. 물론 처음에 나는 우연한 인연으로 참여하게 된 품의 오 히말라야를 통해 기자생활로 지친 마음과 몸을 쉬게 하고 싶을 뿐이었다. 그런 나의 의도를 뒤집어엎은 그 누구도 아닌 내 스스로였다한국에 청소년문화공동체 운동을 20년 가까이-그 당시엔!- 하고 있는 사람과 단체가 있다는 것 자체가 내겐 큰 뉴스거리였다. 또 내로라하는 산악인들만 오르는 줄 알았던 히말라야를 동네 뒷산 오를 힘만 있는평범한 이이 여럿이 함께 걷는다는 것 자체가 뉴스였다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네팔에서 돌아오자마자 랑탕히말라야 이야기를 몇 차례 연재했다. 그리고 내발로 찾아가 심한기 대표를 인터뷰했다. 인연이 취재현장으로 이어지는 경험을 해본 이들은 안다. 그 황홀한 경험이 얼마나 기자 자신의 심장을 벅차게 만드는지. 이제 와 생각해보니 그때의 가슴 벅참은 시작이었다. 그해 5, 한국-네팔청년문화 교류 프로그램의 일원으로 다시 네팔을 찾았다. 여러 가지 프로그램이 진행됐지만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것이 네팔의 교사 연수 프로그램이었다.
 
 
요즘도 그렇지만 2008년 당시에 한국인들은 네팔에 학교 짓는 일을 유행처럼 하고 있었다. 공중파 방송사 아침 프로그램은 이 소식을 선행과 미담 사례 중개하듯 연달아 내보고 있었다그럴 때마다 들었던 생각이 저 많은 학교에 학생들은 다 채워지는 걸까, 보니까 학용품도 부족한 것 같은데 건물만 지으면 되나, 건물은 지으면 되고 학생은 모으면 되지만 가르칠 교사는 있나, 그 교사는 실력이 좋은 분일까였다. 유료였던 교사 연수 프로그램에 네팔의 현직 교사들이 많이 참가했다.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만큼 교육의 질에 대한 관심이 네팔 교사들에게 높았던 것이다. 심한기 대표는 학교 하나 짓는 것보다 교사 한 명에게 새로운 교수방법을 하나 더 가르치는 것이 절실하다고 말했다이제와 고백하지만 이것이 내가 품에 반한 첫 번째 이유였다. 하드웨어보다는 소프트웨어에 작은 자극을 주고 변화를 기대했던 품의 활동은 결국 건물보다는 사람이 중요하다는 오래된 명제를 현장에서 실천하는 것이었다. 나는 품이 여러 가지 측면에서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이 역할을 오랫동안 해주었으면 한다. 이것이 내가 첫 번째로 품에게 기대하는 것이다.
 
 
 
 
# ‘원조가 아닌 연대’..
그러니까 20085월이었다. 네팔 엔지오 품 활동가였던 하니씨의 안내로 품의 카트만두 새 사무실을 구경할 수 있었다. 어수선하고 먼지 많은 카트만두 시내 도로를 지나 어느 한적한 주택가 2층에 네팔 엔지오 품의 사무실이 있었다. 하니씨 책상에 끼워져 있던 마종기 시인의 <바람의 말>이라는 시가 지금도 룽다처럼 펄럭인다. 네팔 엔지오 품의 사무실엔 막 활동을 시작한 청년자원봉사모임 해피 바이브레이션멤버들이 모임을 하고 있었다. 이상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그 당시 네팔 상황에서 청년들이 정치조직이 아닌 문화예술교육 관련 자원봉사모임을 한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해 네팔 정국은 몹시 불안정했다. 200년 만에 왕정을 끝내고 민간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각 정파 간의 대립은 격렬했다. 카트만두 시내엔 전국에서 모인 사람들이 여러 이유로 시위를 하고 있었고, 시위가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네팔 정부당국이 상가의 일시 철시와 일부 통행금지를 내리는 것을 직접 경험하기도 했을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지금 당장의 정권의 변화보다는 문화와 예술, 교육을 통한 네팔사회의 궁극의 변화를 도모한다는 것은 나름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을 테다. 그들에겐 새로운 길을 걷는 두려움을 줄여줄 든든하고 친절한 안내자가 절실했다. 운명처럼 네팔 청년들 곁엔 네팔 엔지오 품이 있었다
 
 네팔 엔지오 품은 한국 운동역사에서도 매우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요즘은 국제연대 활동을 하는 단체들도 현지 사정에 밀착하기 위해 내재적 접근을 많이 시도한다. 이른바 현지화 전략을 많이 사용하는데 불과 4년 전인 2008년만 하더라도 품의 네팔 현지화 전략은 매우 드문 경우였다. 특히 네팔 엔지오 품을 퍼주기를 편하게 하기 위한 현지 조직이 아닌 자생적인 활동을 위한 현지 조직으로 운영했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즉 한국의 시선이 아닌 네팔의 시선으로 네팔을 응시하게 하고, 한국의 힘이 아닌 네팔 청년의 힘으로 네팔 문제를 해결한다는 원칙을 견지한 현지 조직을 꾸렸다는 것은 원조가 아닌 연대의 참된 시작이었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품에 반한 두 번째 이유다.
 
 
그해 여름이었던가. 네팔 엔지오 품 사무실에서 만났던 네팔의 청년들과 한국에서 다시 만날 수 있었다. ‘한국-네팔 청년문화실천워크숍이 이번엔 네팔이 아닌 한국에서 열렸기 때문이었다전남 장성 백양사에서의 템플스테이와 5.18 광주 둘러보기 일정을 난 그들과 함께 할 수 있었다. 아마 5.18 구묘역에서 나오다가 잠깐 그런 얘기를 한 것 같다한국 사람들 중엔 품을 모르는 사람이 아는 사람보다 훨씬 많아요. 하지만 그것은 중요하지가 않죠. 우리는 서로 한국의 엔지오 품이건 네팔 엔지오 품이건 품을 통해 만났고, 이렇게 다시 만났으니까요. 앞으로 계속 그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날의 바람은 지금 이 순간에도 변함이 없다. 그날의 바람은 품에게 바라는 나의 두 번째 기대이기도 하다.
 
 
 
# 학교가 살아야 마을이 산다
사람 사는 것은 어디나 비슷해서 한국이나 네팔이나 사람들이 도시로 몰리는 것은 똑같은 현상이다. 갈수록 피폐해지는 산골과 농촌의 살림은 더 이상 사람들에게 따뜻한 먹을 것과 안정된 일자리를 주지 않는다남아있는 사람들은 떠난 이들의 빈자리만큼 깊이 파인 공허를 쉽게 채우지 못한다. 그렇다고 무작정 떠날 수도 없다. 청년이 살아도 무기력한 마을, 아이들이 놀아도 스산한 동네.... 스러져가는 마을엔 반드시 폐교가 있다5년을 다녔던 섬마을 학교가 폐교된 후 가본 적이 있다. 부서진 유리창, 작은 운동장에 웃자란 띠.... 공포영화를 촬영하면 되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였다학교가 문을 닫자 동네 분위기도 변했다. 뜻있는 동네사람 몇이서 폐교가 된 학교를 마을에서 구입해 연수원 등으로 활용하자는 제안을 했지만 누가 이 외딴 섬마을 깊은 마을까지 수련회를 오겠냐는 현실론에 없던 일이 되고 말았다그런 경험 때문이었을까. 품이 카트만두 인근 베시마을에서 행복한 마을(happy village)’ 프로젝트를 본격적으로 시작할 때 내 고향일처럼 반가웠다. 특히 행복한 마을 프로젝트 모토로 삼았던 학교가 살아야 마을이 산다는 내 가슴까지 뛰게 만들었다.
 
 
예의 품의 사업방식대로 마을 청년들로 짜진 교사진은 베시마을에서 방과 후 학교를 시작했다. 정밀하게 확인해보진 않았지만 아마 네팔 최초의 방과 후 학교가 아닐까 싶다방과 후 학교와 함께 베시마을 사진 전시회를 위한 사전 작업이 시작됐다. 동네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가까이 있어 무시했던 존재들을 다시, 깊게 들여다보는 작업이다. 존재의 재확인, ‘그래 저이가 이런 분이었지’ ‘맞아 저 나무 아래서 우린 이렇게 자랐어’.... 너무 친근해서 무시하고 함부로 대했던 가장 오래되고 깊은 것들에 대한 재발견. 그리고 마을학교에 작은 도서관을 짓는 공사가 함께 또 시작되었다. 품은 변함없이 돈을 대지 않는 대신 공사재료와 노동력을 제공해 달라고 해 마을 도서관은 시혜의 공간이 아닌 함께 만든 공동의 작품이 될 수 있었다. 비록 가난해서 돈은 내지 못했지만 내 아이들을 위해, 우리 후배들을 위해 나의 노동으로 지은 도서관. 얼마나 가슴 뿌듯한 일이었겠는가. 그래서 베시마을 도서관 완공식은 마을의 경사가 될 수 있었다마을 주민들이 정성껏 마련해온 음식을 나눠먹으며 서로 배를 채우고, 아이들은 푸른 하늘빛으로 더욱 찬란했던 만국기 아래 좁은 운동장을 초원처럼 내달리던 그날이 생생하다
 
 
베시마을의 경험은 품에게 골리로 갈 수 있는 희망의 근거가 된 것 같다. 그렇게 품은 에베레스트 바로 아래 동네에 마을 도서관을 함께 세웠다. 작년엔 카트만두 시내에 있던 품 사무실을 정리하고 아예 베시마을로 들어갔다고 한다. ‘마침내 품이 베시마을 식구가 되었구나, 이제 말 그대로 네팔 엔지오 품이 되었구나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오래된 마을에서, 오래된 미래를 찾아가고 만들어가는 품. 내가 품에게 반한 세 번째 이유다. 세 번째 기대 또한 베시에서처럼 더욱 오래된 미래를 만들어갔으면 하는 것인데 써놓고 보니 너무 가혹한 기대인가 싶기도 하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품이니까 말이다
 
20주년이다. 10년도 버거운데 한 길을 20년 동안 묵묵히 걸어온 품에게 깊은 존경의 인사를 드린다. 그리고 감사하다. 20년의 길에 작은 부분 함께 할 수 있게 손 내밀어주셔서. 그렇게 또 언젠가 손 맞잡고 걸을 날을 다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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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빈(오마이뉴스 기자)
오마이뉴스 기자이다. 거침없이 긁어대는 진실에 여럿 죽었다고 한다. 지금도 끝나지 않은 강정마을이야기 '구럼비의 노래를 들어보라'를 읽어보면 그의 삶과 일상이 보여진다. 무당이 주선하는 '오~히말라야'를 두 번이나 참가했고 품이 진행한 '한-네팔 문화예술교육 워크숍'에도 참께 했었다. 그의 무기는 '볼펜'이지만 인간과 인간 사이에 품어야 할 따뜻함은 이주빈을 아는 사람들은 다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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