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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을 말한다. 셋] 내가 품을 만난지 어언 7년이 지났다 _ 김월식(커뮤니티 아티스트)

글쓴이 : PUM 날짜 : 2014-01-23 (목) 16:48 조회 : 1942
내가 품을 만난 지 어언 7년이 지났다.
 
 
내가 품을 만난 지 어언 7년이 지났다. 하지만 아직 회고할 만한 추억이 없다. 지난 7년 내게 벌어진 수많은 일 중 품과의 인연 또한 적지 않았지만 삶의 불가해하고 불확정한 매일을 살아가는 예술가에게 회고란 일종의 명예로운 은퇴가 아닌가? 나는 아직 추억을 이야기하기에는 부족한 현재 진행형의 삶을 살고 있고, 품 또한 이제 갓 스무 살의 청춘을 돌파하고 있다. 우리의 레이어들은 그 층위가 전방위적이여서 가끔 만나고 또 가끔 떨어져서 동시간의 다른 영토를 여행하고 개간한다. 품과 나는 그것이 서로에게 좋다.
 
 
 
사건을 만드는 재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건을 만드는 재주에 당하지 않을 재간은 별로 없다. 흘러 다니는 삶과 사건으로서의 만남은 사고를 치장하는 좋은 구설수이다. 문화란 대체로 이렇게 퍼져 나간다. 서로에게 편리한 기억을 토대로 비교적 사실성의 담론에서 자유롭고, 허구와 오인의 해석이 용인되고, 이놈 저놈의 다성적 목소리의 합창도 가능하기 때문에 오히려 사실적이 되기도 하고 말이다. 때문에 한명의 예술가와 품 같은 문화공동체의 만남은 소문과 같은 사건을 만들기에 적합하고, 그 소문 안에서 서로의 진위를 확인하려는 시도는 이미 넘쳐나는 자가 증식의 문화를 봉합하려는 미련한 처사일 뿐, 결국 이 모든 배후에는 사건을 도모하는 유전자들의 자유방임적 구애가 깔려 있지 않을까? 말하자면 이 구애는 스스로를 원하는 자리에서 끌어내리지 않고 상대방에 노골적으로 치근덕거리지 않으며, 외도를 인정하고, 돌아오지 않는 탕아를 멀리서도 독려하는 방식이다. 그야말로 무늬만 구애인 이 프로포즈들은 그래서 유머를 관계의 매개로 삼아 서로에게 욕을 해도 무방한 광의적 연대를 꿈꾸게 한다.
때문에 예술과 문화의 연대는 이 차이를 연대하게 하는 사건이 되고, 결국 이 사건은 서로를 오염시키기도 하고 흉내 내게 하기도 하며 절대로 닮으면 안 되는 명분을 제공하기도 한다.
 
 
 
수행을 수행하기
실천적 의미로 목적성을 분명하게 하는 방식에 동조하는 사람들은 수행의 과정을 설계하는 처음부터 수행의 목적과 배경 철학 등을 주변과 공유한다. 이는 가치를 공유하거나 나눔으로써 공동의 목적에 연대감을 갖게 하고, 이 연대의 명분은 곧 수행의 기준점들이 되어 준다. 때문에 이 수행들은 대체로 일사불란하고 조직적이며 헌신적이고 전체적이다. 많은 공동체들은 이 공동체적 목적성에 부합하는 과제를 수행하는 데 있어 각자 맡은 바 역할이 있어, 이를 책임 있게 수행하고 결과의 의미 또한 책임 있게 고민하며 나눈다. 또한 이 과정에서의 문제점들을 수정하기 위해 노력하고 반복되는 실수를 줄이기 위해 꼼꼼하게 확인 또 확인한다. 대체로 일을 잘한다는 평가는 이런 책임 있는 수행성에 기인한다. 그래서 품은 일을 잘한다. 게다가 지속가능한 프로그램으로 다년간 그 책임을 지역과 주변에 나누어 주며 공동체를 확장하고 또 그 안에서의 역할에 대하여 고민한다. 다분히 다자간의 대화와 상호작용 속에서 작동하는 품의 수행성들은 중심을 가진 다양성이다. 이는 다분히 현실에 기반을 둔 나무의 다양성이다. 그런데 나는 이런 품을 바라보면서 늘 리좀(Rhizome)을 떠올린다. 무언가 비 위계적이고 복수의 층위에서 경계를 흐리고 상위 이웃을 통하지 않고 객체적 접속이 더 가능할 수 있는 리좀의 관계망들은 현실적 이항대립을 극복하며 잠재적으로 자유로운 접촉면을 만드는 수행이다. 아마 문화적 실천의 수행이란 이런 내면의 잠재적 사유를 함께 꾸는 꿈일 수 있다. 중심을 가진 다양성과 자유로운 접속 가능성이 유동하는 잠재성의 차원이 함께 꾸는 꿈. 나는 품도 분명 이 꿈을 함께 꾸고 있다고 믿는다.
 
 
 
생태적 토양으로써의 거친 밭
결국 중심을 가진 다양성과 자유로운 접속 가능성이 유동하는 잠재성의 차원이 함께 꾸는 꿈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품이 갖고 있는 생태적 토양 때문이다. 이 땅은 제도권 밖의 비상식적 영토이며 다수의 쓸모 있는 영토에서 뛰쳐나온 쓸모없는 영토이다. 이 불안전한 밭의 생물들은 대다수 학교와 지역의 예각과 변두리에 존재하고, 가족과 친지의 불안에 존재하며 무엇보다도 스스로를 제도적 시스템에 안착시키지 못하는 꼴통 근성에 존재한다. 때문에 품의 아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늘 익지 않은 날 것 같은 생 비린내가 나며, 잡초 같은 곤조가 느껴지고 충동과 감정의 서슬들이 보인다. 미술 교육이 제도화되어 학교로 들어 온 세월이 100여년, 이 근대의 교육 상품이 날 것의 예술을 얼마나 잘 정돈시켜 길을 들여 놓았는지 나는 요즘 예술학교에서조차 품의 아이들처럼 막무가내들을 잘 보지 못한다. 결국 품은 이런 생태적으로 거친 밭의 쭉정이들과 모난 돌을 품은 토양이다. 토양이 이러하니 잡초라도 좋고 쭉정이라도 좋으며 모난 돌이라도 좋고 자갈이어도 무방하다. 그저 그 곳에서 생긴 것처럼 놀면 그뿐인 것이다. 날 것의 미학은 사실은 인정하는 진정성을 바탕으로 한다. 그 진정성이 날 것과 만나서 감각적으로 발화하는 지점이 예술의 경계를 넘어서는 지점이다. 바깥에 서서 늘 딴 곳을 바라보며 생짜 그대로 낯선 곳을 기웃거리는 청춘이던 나는 그래서 그 품이 그립고 설레나 보다. 적어도 예술가의 직관 안에서 품의 아이들은 그렇다.
 
 
 
시정잡배의 혼성모방과 이종교배
배신의 말로를 비극으로 받아들이는 경우 대체로 그 플레임들은 권선징악의 도덕적 플레임일 확률이 높다. 그만큼 신의와 믿음을 중시하는 공동체 안에서의 배신이란 단어는 도덕적으로 불명예를 안기 십상이다. 하지만 입장을 조금 바꾸고 다른 각도에서 보면 배신을 긍정의 신호로 받아들였을 때 배신이야말로 예술적 창조 도구가 되고 도덕이란 때론 철지난 클리셰가 될 수도 있다. 새로운 역사와 맥락에서 배신은 자유로운 연애만큼이나 생산적이고 매력적인 창조기계이다. 때문에 나는 기회가 될 때 마다 주위의 사람들에게 배신의 장미가 되라고 충고한다. 나는 품이, 품의 아이들이 배신의 장미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특히 하고 싶은 모든 일에서 주눅 들지 말고 매번 새로운 시도에 겁먹지 말고, 거리에서 골목에서 마당에서 시장에서 다양하고 황당한 경험에 매료되었으면 한다. 이 황당한 경험이란 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는 가이드라인을 없애는 일이기도 하다. 또한 절대 해서는 안 되는 것을 해 보는 일이다. 이 다르고 낯선 것들의 조합은 늘 새로운 상상력을 생산하고 예측하지 못하는 경험치를 선물한다. 일상을 늘 여행하는 것처럼 살 수 있는 삶이란 결국 늘 새로운 일상을 마주하는 것이기도 하다. 지속성, 지속가능성의 단단한 무게를 살며시 내려놓고 자율성과 새로움의 옷을 입고 패션모델처럼 간지 있는 워킹으로 당당하고 자신 있게 사교하며, 시정잡배처럼 남의 것을 훔치고 방탕하게 돌아다니면서 교배하는 삶에서도 긍정의 텍스트를 읽어낼 수 있다면 그것은 차이에 대한 이해일 수 있고, 칼날 같은 상식의 경계를 넓혀서 그 영토에 집을 짓는 일이며, 자칫 단선화 되고 패턴화 되는 공동체의 삶을 파편적이고 개별화시켜 개인이 행복한 삶을 독립적으로 설계 할 수 있는 단초로 활용할 수 있지 않을까? 결국 이 단초란 개인이 행복한 공동체이며 차이와 차이가 만나서 다양한 상상력이 생산되는 문화적 예술적 공동체를 상상하게 한다.
 
 
 
은혜로운 공동체보다 차이의 공동체
나는 매달 품과 안산의 대안 공간 리트머스에 적지만 얼마간의 돈을 후원한다. 그래서 난 품의 주주이고 리트머스의 회원자격을 갖는다. 이 땅의 가난한 아티스트에게 주머닛돈을 털어 기꺼이 후원하게 하는 명분이란 결국 뜻을 같이 한다는 것 보다는 차이의 연대에 가치를 둔다는 것이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차이에 주목하며 그들의 목소리를 격려하고 다름에 감사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목적성을 같이 하며 그 안에서 은혜롭게 나누는 감정의 상호작용이라기보다 차이 속에서 숨 쉴 수 있는 공통의 영토에 대한 소유욕일 수도 있다. 가끔 만나서 즐겁게 숨 쉬고 다시 자신의 영토에서 다른 집을 짓는 우리의 느슨한 관계는 늘 긴장을 즐거움으로 바꾸면서 서로의 집짓기를 격려한다. 우리가 따로 따로 집짓기를 하다 만난 지 7, 그 동안 우리는 가끔 공통의 영토에서 서로의 간을 보며 친해졌다. 문화를 실천하며 그런 사람들을 짓는 품은 나에게 늘 다름을 선물하는 친구이다. 나는 가끔 품을 통해서 내가 예술가임을 깨닫기도 하고 망각하기도 한다. 이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관계의 디자인이다. 가장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예술가와 사회적 책임감과 열정이 만나 발생하는 이 오염은 나의 예술을 변화시키기도 하고 품의 문화적 실천을 자극시키기도 한다. 때문에 난 더 철저하게 예술가의 삶을 살아가며 삶의 고민과 문제들을 예술의 과제로 풀어 갈 것이다. 품은 더욱 품의 고민을 품의 방식으로 살아내야 한다. 자칫 서로의 모습이 너무 닮아져 이 차이의 연대가 무너진다면 나와 품은 더 이상 친구가 아니다. 나는 품과 서로의 다른 차이에 대하여 욕하며 쌍스럽게 막말하면서도 상처받지 않는 편안한 친구로 남길 바란다. 오랜 친구는 그래서, 그래서 좋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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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월식(커뮤니티 아티스트)
아티스트 겸 무비스타이다. 'Art is process'를 말하며 쉽게 이해하기 힘든 과정들을 만들어가는 '우뇌활성화 나라'의 비공식 임금님이다. 품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지만 존중과 신뢰의 상호적 핑퐁게임은 늘 동점이다. 다소 고지식한 품의 문화적 상상에서 쾌활한 예술적 실천을 연결하게 해 준 품 역사 속의 명랑현자이다. 그리고 몇몇 품 청년들은 김월식의 "ART地"에서 허우적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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